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산하향 운동 (문단 편집) === 마오쩌둥 사후 상산하향 운동 === 1977년 8월, 중국 공산당 제11차 전국대표대회는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정식 공표했다. 그 후 1977년 12월 12일에서 이듬해 1월 13일까지, 국무원은 성, 시, 자치구의 지식청년 책임자 좌담회를 열었다. 회의는 국가계획위원회의 부주임이자 국무원 지청지도소조의 부조장인 구슈롄(顧秀蓮, 고수련)이 진행했다. 또한 회의는 제목만 출제하고 문제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면서 주로 지방의 의견을 청취했다. 당과 국가 지도자인 화궈펑(華國鋒), [[예젠잉]](葉劍英), 덩샤오핑(鄧小平), 리셴녠(李先念, 이선념), 천융구이(陳永貴) 등은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을 접견했으며, 리셴녠과 천융구이는 대표들의 의견을 직접 청취했다. 그러나 지식청년 문제는 매우 민감했기 때문에 다들 의사표명을 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맡고 있던 천융구이 부총리조차도 "지식청년 작업은 매우 복잡한 일이다. 우리 부총리들은 이 일이 거론되기만 하면 머리가 아프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좌담회는 몇 가지 문제를 거론했다. 첫째, 지금까지 상산하향의 방향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은 청년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었다. 일부 하향 청년들은 자신들이 사인방의 희생물이며 사인방을 타도했으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영향력 있는 일부 선진청년들도 자신들이 나아가고 있는 길이 과연 맞는 것인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상산하향을 계속 이어가는 건 여러모로 무리였다. 둘째, 하향 청년을 채용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아 민심이 흉흉했다. 어떤 청년거점에서는 이 소문을 들은 청년들이 밥솥이나 문과 창을 부수고 인민공사나 생산대의 간부를 찾아가 따지기도 했으며 도시로 돌아가 상급기관에 집단으로 문제해결을 요구하기도 했다. 셋째, 일부 지방에서는 하향청년들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다. 일부 지방에서는 하향청년이라고 하면 모두 “머리에는 뿔이 돋아 있고 몸에는 가시가 돋쳐있다”라고 표현되는 반 조류,반혁명주의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청년거점의 숙정(肅正)이라고 하면 청년들을 축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몽골 자치구]]의 한 기(旗, 내몽골의 행정단위로서 현(縣)에 해당)에서는 기층 간부를 맡고 있던 100여명의 하향청년들을 모두 해직시켰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그들의 짐 꾸러미를 내다 버리거나 모조리 불살라 버리기도 했다. 넷째, 지식청년들의 관리를 맡고 있던 관부들의 압박감과 초조감이 극에 달했다. 그들은 상부의 지시를 철저히 이해하지 못했고 군중도 설득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그 사이에서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어떤 지역의 9개 현과 시의 지청부문의 주임들은 다른 일을 하겠다며 전임을 신청하기도 했다. 좌담회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무원 지식청년지도소조가 주최가 되어 중조부, 중선부, 최고인민법원, 국가계획위원회, 그리고 재정부, 교육부, 농림부, 상업국, 공안국, 위생국, 노동부, 출판부, 물자부 등의 부문과 중국 인민해방군, 총 정치부 및 노동조합, 공산주의 청년단, 중화 전국여성 연합회와 회동해 방안을 마련하기로 확정했다. 또한 각 성, 시, 자치구의 당위원회에서는 중공 중앙부와 국무원의 방법을 참조하여 모든 역량을 모아 조사 연구를 진행하고 여기에 경험을 활용하여 현존하는 문제에 대해 해결안을 제출하고 국무원에 보고하도록 건의했다. 또한 좌담회는 조사연구가 필요한 문제 11항목을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1)“4인방”의 해독을 어떻게 숙청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 >(2)중소도시의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분배방향에 관한 문제 >(3)하향청년을 안착시키기 위한 합리적 안배에 관한 문제 >(4)하향청년의 안착형식에 관한 문제 >(5)주주시(株洲市)의 공장과 인민공사가 연계하여 하향한 지청을 집단 안착시킨 경험을 보급 확산하는 문제 >(6)청년거검의 건설에 관한 문제 >(7)하향청년의 양성과 교육에 관한 문제 >(8)하향지청의 역할을 어떻게 발휘시킬 것인가에 관한 문제 >(9)하향청년의 실질적인 어려움에 대한 통합적 해결에 관한 문제 >(10)경비와 물자관리의 정비와 정착에 관한 문제 >(11)지청공작에 대한 지도강화문제 1978년 3월 28일, 덩샤오핑은 후자오무(胡喬木)와 덩리쥔(鄧力群)과의 담화에서 중소도시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노동력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를 연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의 상산하향 방법은 장기적인 것이 못되며 농민들도 반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쓰촨 성의 1억 사람들은 1인당 평균 1묘의 땅도 갖고 있지 못하는데 도시인들의 하향은 농민들과 밥그릇 싸움을 하게 만드는 꼴이 된다며, 우리의 첫 걸음은 마땅히 도시 청년을 하향시키지 않는 일을 완수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며, 그런 다음에 농촌으로부터 인력을 흡수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덩샤오핑의 이 같은 뜻을 받든 중공 중앙부는 1978년 4월 13일 농림부의 <국무원 지식청년 상산하향지도소조와 사무실관리체제 조정에 관한 보고>를 비준했다. 지도소조의 인원을 조정했으며 농림부에서 대신 관리하고 있던 국무원 지청부문을 국가노동총국 당 그룹에서 지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4월 30일, 당 중앙의 비준을 거쳐 허셔평을 국무원 지청부문의 주임으로 임명하고 국가 노동총국 부국장과 당 그룹 부서기를 겸임하게 했다. 이후 국무원 지청부문은 1978년 7월 20일 당 중앙과 국무원에 <중소도시 지식청년의 상산하향 방침 문제에 관한 지시요청 보고>를 전달했다. 이 보고는 실상 곧 개최될 전국지식청년 공작회의를 대비해 기조를 확립한 것이었다. 1978년 10월 7일, 중공 중앙부는 <전국 지식청년 상산하향 업무회의 개최에 관한 통지>를 발표했다. <통지>는 지식청년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마오쩌둥 주석의 생전의 염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회의를 통해 다음 7가지 문제를 연구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지청의 상산하향운동을 방해하고 파괴한 “4인방”의 죄행을 깊이 파헤치고 비판해야하며 그 해독과 영향을 말끔히 씻어내야 한다. 지청의 상산하향에 관한 모 주석의 일련의 지시를 완정하고 정확하게 이해하여 집행에 관철시켜야 하며 사상적 인식을 통일시켜야 한다. >2)어떻게 취업문을 넓힐 것인가, 또 지청을 안착시키기 위해 어떤 다양한 형식을 채용해야 하는가를 연구해야한다. >3)도시수용정책의 조정문제를 연구해야 한다. 즉 적은 수를 하향시키거나 아예 하향시키지 않는 방안을 점진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 하고 현재 어떤 도시들에서 이미 상산하향을 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안배하고 있는 문제를 점검해야 한다. >4)농촌에 있는 800만의 지청, 특히 1972년 말 이전에 하향한 지청 문제를 어떻게 “통합적인 계획을 세워 해결”할 것인가를 연구해야한다. >5)지청작업의 전형적인 경험을 총결하여 보급 확산시켜야 한다. >6)하향한 지청을 대상으로 한 근로 외 여가시간을 이용한 교육과 훈련을 어떤 식으로 전개하여 그들이 농촌에 과학 및 문화지식과 과학실험을 보급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역할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 것인가를 연구해야한다. 그리고 지청을 박해하는 범죄행위를 어떻게 하면 바로잡아서 지청의 건강한 성장을 보호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연구해야한다. >7)지청작업의 지도체제를 연구해야한다. 즉 사무기구 강화와 생산 대 인솔 간부의 관리 문제가 있으며, 사상정풍의 문제와 조직기구와 경비관리 등의 문제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를 연구해야한다. <통지>는 각 성, 시, 자치구의 당위원회가 조직의 역량을 최대한 모아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고 덧붙여 경험을 총결할 것과 회의에서는 당면 작업의 추진에 관해 논의가 되어야하며 이를 통해 노력으로 해결 가능한 그 문제들을 착실히 해결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또한 선전보도를 강화하고 모범이 되는 개인이나 단체를 표창하여 상산하향은 영예로운 일이라는 여론을 대대적으로 형성하는 것은 물론 조사결과 및 전형적인 경험을 국무원에 보고하도록 했다. <통지>가 하달된 후에 각지에서는 즉각적으로 행동에 돌입했고 지도간부의 지시에 따라 착실하게 준비해나갔으며 대량의 문서자료를 갖추게 되었다.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은 매우 빠르게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도시와 농촌의 각계에서는 중앙이 민심에 순응하는 정책결정을 해줄 것을 간절히 고대했다. 이 시기 덩샤오핑을 위시로 한 중국 지도부는 상산하향 운동을 종결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앞으로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진행해야 하는 가였다. 만일 상산하향의 중지를 절대적인 것으로 선포한다면, 본디 취업난을 겪고 있는 중소도시에 막대한 수의 하향한 지청들이 몰리면서 취업난은 사회를 위태롭게 만드는 문제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만일 하향과 도시수용을 번갈아 진행하는 방법을 취한다면, 인력과 재산이 낭비될 것이며 취업문제도 해결되지 않아 국가는 감당할 수 없는 경제적 부담을 안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상산하향 운동을 점진적으로 축소시키고 하향 청년들을 조금씩 고향으로 돌려보내 점차 상산하향 운동을 종결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1978년 10월 31일에서 12월 10일까지 전국 지청 상산하향 작업회의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국무원 지식청년 지도소조의 임원과 각 성, 시, 자치구의 지청작업을 주관하는 당서기 또는 당 위원, 혁명위원회 부주임, 지청사무소 주임, 일부 성, 시, 자치구의 계획, 노동, 농림, 농지개간, 재정, 문확육 부문의 책임자, 일부 지역 및 현, 기업의 대표와 중앙 관련 부문, 중앙군사위원회의 각각의 총사령부 및 대규모 군사지역들의 346명이 회의에 출석했다. 정부는 이 회의를 통해 상산하향 운동의 폐지를 확정지으면서도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점진적으로 상산하향 정책을 축소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런데 회의가 진행되고 있던 11월 23일, '중국청년보'가 <지청의 상산하향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자>라는 제목의 논평원의 글을 발표하여 회의장 안팎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글은 린뱌오와 사인방은 무수한 지식청년들의 혁명적 열정과 그들이 세운 중대한 공헌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거액의 정치자금을 챙기는 한편, 이 수단을 적극 활용하여 장철생과 같은 깡패들을 긁어모아 길러낸 후 각 급의 당과 정부 및 군의 지도급 간부들을 공격하도록 교사하고 선동하는 등 당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죄악을 일삼았다고 했다. 또 린뱌오와 사인방은 상산하향을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으로 만들어놓고 피해갈 수 있었던 수많은 갈등들을 인위적으로 조장했을 뿐만 아니라 종합적 계획을 통해 지청문제를 해결하라는 마오쩌둥의 지시를 사력을 다해 반대하고 관련 정책과 조치의 실현을 막아버림으로서 본래 해결할 수 있었던 수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회의에 출석한 대표들은 회의 기간에 이런 기조의 글을 발표한 것은 매우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며 또한 이것이 정국의 안정화에도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상하이 대표는 이 글을 본 즉시 시위원회의 지도자에게 전화를 걸어 혹여 상급 기관에 상황을 알리고 해결을 요구하러 온 청년들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시 지청사무소의 사상교육을 단단히 시켜놓으라고 지시했다. 운남 대표는 운남 국영농장의 지청들이 지금 도시로 돌아가겠다고 난리들인 마당에 이 글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거라고 우려했으며 헤이룽 강 대표는 가뜩이나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이 일 때문에 머리가 아파 쓰러질 지경이니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하게 알아내기 전에는 돌아가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글은 지식청년들에게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장쑤 성 의홍현의 장주 공사에서 일하던 18명의 지식청년들은 이 글을 본 후 바로 현 정부 소재지의 거리로 나와 대자보를 내붙이고 "상산하향은 잘못된 것이다. 정책을 폐지하고 도시로 보내 달라."고 외쳤다. 상하이에서는 하향청년들이 시의 인민광장과 중산공원, 기차역으로 몰려들어 "논평원의 글을 옹호하자."라는 표어를 내붙이고 "글은 지청과 가장의 속내를 대변한 것이다."라고 외쳤다. 현에서 파견한 지청의 안착을 담당했던 몇몇 관료들은 지청 명단을 가지고 상하이 시 정부를 찾아가 하향청년들을 모두 데려가 달라고 요구하며 자신들은 더 이상 4인방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또한 시와 구로 해결을 요청하러 온 청년들이 급증했으며 그들 사이에서도 상호연합이 이뤄지면서 거리 시위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이에 정부는 수습에 나섰다. 11월 29일, 지청지도소조는 회의에 참석한 각 성, 시, 자치구의 책임자들과 지청사무소 주임을 소집한 후 논평원의 글은 결코 회의의 정신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고 이 글의 발표에 대해 사전에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후야오방은 중국청년보를 찾아가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아 도움은커녕 오히려 방해만 되는 짓은 다시 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그 후 12월 10일 장장 41일간의 전국 지식청년 상산하향업무회의가 막을 내렸고, 12일 중공중앙부는 회의에서 결정된 <전국 지식청년 상산하향업무회의 요록>을 각지에 배포하고 이대로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정부의 예상과는 달리 하향청년들은 회의 결과가 통보된 뒤에 오히려 불안을 느꼈다. 그들은 애초에 농장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고 정부는 바람과는 달리 자신들을 당장 보내줄 의향이 없어보이니 도시로 귀향할 희망이 사라졌다고 판단했다. 이에 절망한 청년들은 각지에서 파업과 소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10월 하순, 경홍시 제10농장의 학교 교사이자 하향한 상해지청인 딩후이민(丁惠民)은 “덩샤오핑 부총리에게 전하는 공개 연명서한”을 기초하고 이 농장의 974명에게서 공동서명을 받았다. 서한의 주요 내용은 농장의 지청들이 처해있는 곤경과 도시로의 귀향 요청이 반영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딩후이민 등은 11월 28일에서 29일까지 경흥시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각 농장에서는 회의에 참가할 지청대표를 보냈다. 회의에서는 지청들을 조직하여 도보로 곤명시까지 가고 그 후에 북상해 청원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경흥시, 맹해시, 소맹창읍, 맹차읍, 맹만읍, 맹방읍, 맹랍현 등의 7개 농장에서 3만여 명의 지청이 파업에 돌입했다. 그 결과 이 지역의 개간 작업은 마비 상태가 되어버렸고 식량 생산은 중단되었다. 12월 27일, 딩후이민을 대표로 하는 청원단이 기차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들은 천안문과 서단에 대자보를 내붙이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12월 30일 국가농지개간총국, 국무원 지청부서 및 국가노동총국의 책임자들은 정헤민 등의 발언을 청취한 후 지청들의 실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할 것임을 약속했다. 이듬해 1월 2일, 민정부 부장 정자화는 국가농지개간총국,국가노동총국,국무원지청부서 등 관련부문의 책임자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고 정혜민 등 지청들이 베이징에 와서 청원하고 있는 이 사태에 대해 논의했다. 1월 4일, 국무원 부총리 왕진과 정자화는 정혜민 등 10명의 청원단 대표를 접견했다. 이 자리에서 왕진은 농장의 지청들이 국가인민의 이익을 중시하여 좀더 원대한 안목으로 변경 발전에 대한 포부를 갖고 변경을 개발하고 수호해주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아래는 부총리 왕진과 정혜민 등 청원단의 대화 기록이다. >왕진: 최근 며칠동안 외국 손님을 접견했는데 오늘은 자네들같은 내빈을 회견하는군. (청년들의 이름을 물어보다 이장수(李長壽)의 이름을 들은 뒤) 이름이 참 좋군. 장수라! 내 나이 올해 70이 넘었으니 3~5년 더 있다가 마오 주석을 뵈러 갈 것이네. 자네가 내 나이가 되려면 반세기는 더 있어야겠군. 이렇게 소란을 피우고 다니면 되겠는가? 이리한다면 우리의 국가가 어찌 부강해질 수 있겠는가? 나와 민정부장 정자화 동지가 자네들과 이야기를 나눌 것이네. 자네들은 장수죽 동지와 만난 적이 있겠지? >딩후이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왕진: 동지, 우리 오늘 마음속 이야기를 나눠보세. 화주석을 대표로 하는 당 중앙이 사인방을 척결한 것에 대해 자네들은 찬성했겠지? >딩후이민: 찬성합니다. > >왕진: 사인방을 척결한 후 전국은 태평한 형세를 보이고 있네. 국제형세 또한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어. 중, 일간에 평화우호조약을 맺었고 중미는 국교 수립을 했어. 작년처럼 그렇게 심각한 가뭄이 반세기 전에 불어닥쳤더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을 지 알 수 없을 걸세. 문화대혁명 동안 린뱌오와 사인방들이 홍위병을 선동하여 마오 주석을 따라 여러 해를 남정북벌했던 우리들 교사와 원로 동지들, 또 각급의 지도간부들을 무참히 짓밟았지. 많은 늙은 노동자들이 맞아죽거나 다쳤고 나 또한 가두행진을 당했네. 정자화 동지도 여러 해 동안 파면당한 채 지냈어. 우리 당정군(党政軍)의 원로인 무산계급혁명가 등소평 동지도 그들에게 모함을 당했어. '2월 역류'라느니,“비림비공비주공(批林批孔批周公)”이란 말로 우리 전인민이 경애하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비판한단 말인가. 그들이 무정부주의 소요를 일으켰던 것은 원로간부 전체를 타도하려고 했던 거야.무정부소요가 일어난 이 10여 년 동안 본래는 학교도 잘 다니고 있었을 자네들을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게 만들어 놓지 않았나. 잘 생각해보면 자네들도 피해자가 아니던가! >딩후이민: 그렇습니다. >왕진: 서쌍판납(西雙板納)의 국영농장의 간부들도 과거에는 청년시절이 있었다. 그들 모두는 그 낙후된 지역을 선진지구로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자진해서 변경건설에 나섰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응당 먼저 그 동지들의 공로와 노고를 인정해야한다. 물론 농장을 잘 경영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내가 그들을 대표하여 자네들에게 사과하는 바이다.화주석이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선포한 것은 정국의 안정과 단결을 꾀하여 이 국면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자네들은 나갈 때 그 천 조각(청년들이 가슴에 단 "북상청원대표"라고 쓰인 붉은 천조각을 가리킨다.)을 떼내어버리는 것이 어떤가? >(청년들은 왕진의 말에 하나둘 씩 붉은 천조각을 떼내었다.) > >왕진: 분명하게 말하지만, 자네들의 행동이 정당한 것은 아니네. 그러나 자네들에게 앙갚음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보장하겠네. 책임지고 고치면 되는 것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네. 우리 두 늙은이가 자네들에게 분명히 말하겠네. 반드시 국가대사를 먼저 생각해서 정국의 안정과 단결을 꾀하고 정상적인 질서를 회복하여 경제건설을 이룩해주길 바라네. 또 하나, 생산은 증가시키고 절약은 엄격하게 지켜주기 바라네. 단결은 자네들 젊은이에게 달려있네. 금세기 내에 우리나라를 4대 현대화를 이룬 사회주의 강국으로 건설하려면 고군분투해야 한다네.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없을 수 가 없네. 지금 현상에 대해 나 또한 매우 불만이라 잠도 이루지 못한다네.지금도 1억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하고 있으니 이 늙은이들 스스로도 전 인민들에게 죄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네. > >왕진: 요 며칠 나는 외국인을 접견했었네.그들은 우리나라의 내란을 두려워하고 있었네. 그들이 이렇게 말하더군.“우리는 당신들 나라가 강대해지기를 바랍니다.투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돈은 있지만 당신들 나라에 홍위병이 나타난 이후로 우리들이 투자한 것이 깨끗이 날아가버렸습니다.당신들의 원로원수가 위원장으로 있는 인민대표대회에서 법률을 제정하여 우리의 투자금의 원금상환 및 이자지급을 보장해주시기 바랍니다.”지금 우리 농민 한 사람의 1년 수입은 겨우 60여 위안...인가? >정자화: 40위안이 안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왕진: 그래, 그 정도밖에 되지 않네. 덩샤오핑 동지는 늘 어떻게하면 인민의 삶이 좀더 빨리 개선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시네. 마오 주석은 덩샤오핑 동지에 대해 그를 싸움에 능하고 반수정주의 노선을 결연하고 굳건히 지켜나가며 변증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보기드문 인재라고 말한 바 있네. 마오 주석은 엽겸영 동지에 대해서도 “제갈량은 일생 신중하기만 했고,여단(呂端)은 큰 일에 어리석음을 보이지 않았다.”란 비유를 쓴 적이 있었는데,바로 엽 부주석을 칭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마오주석이 연로하여 중병까지 겹치자 그의 주위에는 온통 나쁜 사람들만 들끓었고 옛 동지들조차도 만나지 못하게 했네. 병세가 좀 나아지자 우리의 옛 수장, 바로 덩샤오핑 동지를 모셔왔지. 우리 모두는 참 기뻤어. 후에도 전쟁이 있었는데 우리군은 흐트러지지 않았어. 그것은 바로 선생님들이 계셔주셨기 때문이야. 사인방은 지휘라고는 하지 못했어. 그들은 한 개 군영조차도 움직일 수 없었어. >정자화: 만일 군대에 문제가생겼다면 우리에게 오늘은 없었을 것입니다. > >왕진: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자네들이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네. 덩샤오핑 동지가 얼마 후면 담판을 위해 미국으로 떠날 텐데 국내가 불안정하고 단결되지 않는 상태라면 어떻게 이를 성사시킬 수 있겠는가? 자네들, 소요를 일으켜서는 안되네. 자네들 생각을 바꿔서 자아비판을 해보면 어떻겠는가?우리는 결코 자네들에게 보복 같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네.그러나 돌아가서 자아비판은 하도록 하게. 올해는 3년간의 대 변혁이 그 효과를 나타낸 한 해이기 때문에 전당과 전국의 업무 중점을 모두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위에 올려놓았네.만일 자네들이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나쁜 일도 좋은 일로 바뀔 것이네.다시는 이 짓을 하지 말도록. >왕진: 우리의 국가는 단결이 필요하네. 자네들은 이 사실을 기억해주기 바라네.우리 국가는 단결해야만,지도를 받아야만,민주집중제가 이루어져야만 건설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일세. 나와 정자화도 자네들에게 고참 티를 좀 냈구먼. 정자화 동지의 양손은 모두 장애를 입었다네. 우리들은 구새일생의 삶을 살아왔어. 무엇을 위해서였겠는가? 착한 청년들아! > >(중략) >딩후이민: 왕부총리와 정부장께서 저희들에게 내리신 지시에 대해 제가 지청을 대표하여 태도를 밝히겠습니다. 저희들은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앞날에 대해 저희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마도 저희들 자신에 대한 생각이 좀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후 딩수이민은 수많은 정책들이 농장에서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으며 간부의 작풍문제도 심각하다는 보고를 하면서 중앙에서는 이를 조사해 상응하는 규정을 만들어 농장의 문제들이 중앙의 정책에 따라 해결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희망했다.) >왕진: 국가농지개간총국, 공청단 중앙위원회, 부련의 동지들도 제군의 의견을 청취할 것이다. 어떤 문제들을 고쳐야 할 지 종합해서 민정부에 전달할 것이다. 구체적인 경영관리상의 문제는 농림부와 국가농지개간총국에서 맡아서 처리할 것이다. 제군은 돌아가서 자아비판하고 농장의 일부 간부들의 지도 작풍을 바꾸는 데도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나서서 이야기하는 것은 제군이 이렇게 소요하도록 내버려둔 것에 미안했기 때문이다. 지금 자네들과 얼굴을 맞대고 이런 이치들을 설명하는 것은 자네들로 하여금 신중국의 도래는 쉽지 않았으며 지금은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집중해야 함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다. 전국의 수천, 수만 명의 지청들이 모두 소요를 일으키는 상황에서 어떻게 국가건설을 이루겠나. 농장간부의 작풍이 나쁘다고 보고했는데 이는 고쳐져야 될 부분이다. 일부 동지들만 고치면 금방 해결될 문제다. > >왕진: 제군은 21세기 사람들이다. 안목을 좀 더 넓게 가져야 한다. 지금 우리가 나아가는 길에는 숱한 어려움들이 여전히 산재해 있다. 그러나 앞날은 분명 밝다. 청년들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들 해결해 준다면 우리는 기쁠 것이다. 그대들이 올린 청원서는 우리가 화주석과 등부주석께 전할 것이니 제군은 빨리 돌아가 혁명에 동참하고 4대 현대화를 위해 이바지해주기 바란다. 왕진과 정자화가 청원지청 대표 정혜민 등을 접견하고 나눈 담화 내용은 인쇄되어 운남성의 각 개간지에 배포되었고 지청과 간부들 사이로 전파되었다. 이 담화는 파업과 소요를 진정시키고 지청들을 안심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다수의 농장 지청들은 다시 생산에 들어갔으며, "청원단", "보고단", "연락소"와 같은 조직들도 해산했다. 또한 1월 23일 운남으로 돌아온 청원단 지청대표는 왕진 부청리에게 전보를 보내 조국의 4대 현대화 실현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하지만 지청들의 반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9년 1월 하순 경흥 농장의 부분 지청들이 파업을 선언했다. 그들은 도시로의 귀향이라는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결코 그만두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라오스와 접경지인 맹납농장의 부분지청들은 도시로의 귀향이 수락되지 않자 이미 나무에 칼금을 낸지 2~3년이나 된 백 그루에 가까운 고무나무를 베어버렸다. 파업의 물결은 사방으로 확산되었고 집단 단식투쟁까지 벌어졌다. 1월 23일, 운남성 정부로부터 급보를 받은 국무원은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결과, 지난번 전국지청업무회의에서 국영농장의 지청문제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부족했고 어떤 규정은 지나치게 개괄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에 더하여 장기간 해결되지 못한 농장의 수많은 문제들이 쌓이면서 청년들로 하여금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느끼게 했다고 반성했다. 이후 회의 참석자들은 국무원 지청부서가 상부에 보고한 <일부 집아의 지청의 청원 소요문제 처리에 관한 지시 요청 보고> 중에 제시한 6조항을 그대로 시행하기로 합의했다. >(1) 국영농장을 적극적으로 운영하여 농공연합기업으로 만들어나가고 국가는 이를 장려하며 직공의 임금을 적절하게 올린다. >(2) 협의를 거쳐 고향 도시로 인사이동을 시켜야 할 경우, 병이나 가정형편의 곤란에 의한 퇴직신청 처리에 관한 종전의 규정을 참조하고, 지청부문에서 변함없이 책임지고 처리한다. >(3) 중소도시의 직공이 퇴직이나 은퇴하고 난 후에는 농장에 있는 그 자녀를 채용할 수 있다. >(4) 국영농장에 있다가 참군한 지청은 1979년부터는 퇴역한 후에 부모가 께신 곳으로 돌아가서 직장을 분배받을 수 있다. >(5) 도시에서 직공을 모집할 때 농장에 가서 그 도시에서 하향한 지청을 모집해 올 수 있도록 허가한다. >(6) 상하이 근교에서 윈난성으로 간 청년의 경우 본인이 원적(原籍)에 있는 사대(社隊)에 가겠다고 희망하면 이를 허가한다. 그날 오후 국무원 비서장은 [[쓰촨성]]과 [[윈난성]] 정부에 전화를 걸어 국무원회의의 요지를 알려줬다. 이에 1979년 2월 상순 운남성에서는 베이징, 상하이, 청두시, [[충칭시]], [[쿤밍시]] 등의 대표를 소집해 국무원의 "6조"의 요지를 어떻게 구체적으고 현실화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윈난성의 쿤밍시 대표와 쓰롼성의 청두 및 충링시 대표는 매우 명쾌하게 6개월 내로 농장의 지청을 고향 도시로 돌려보내는 일을 우선적으로 정착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베이징과 상하이는 임시변통의 방법으로 병이나 가정형편의 곤란에 의한 퇴직신청의 길을 이용하는데 동의했다. 6조의 요지는 윈난성의 개간지역에 있는 각 농장으로 전파되었고 지청들은 이 소식에 매우 환호했다. 지청들은 하나같이 6조를 이용해 도시로 귀향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여러모로 궁리했다. 이렇게 고향으로 되돌아가기 운동은 운남성의 개간지역의 각 농장에서 갑자기 생겨났다. 윈난성의 개간지역에서 일어난 '고향으로 돌아가기 운동'은 매우 빠르게 각지로 퍼져나갔다. 1978년 12월부터 21개 성, 시, 자치구에서 하향지청과 변경지원지청이 도시로의 귀향을 요구하는 집회와 청원활동을 벌였고 1979년 2월에는 전국 단위로 확산되었다. 많은 지방에 있는 농장의 지청들이 도시로 귀향하겠다고 소요를 일으켰고 생산 대에 배속되어 있던 기혼 청년, 이미 현지 지방에서 취업시켰던 지청, 하향 후에 참군했다가 퇴역해서 외지에서 일하고 있는 지청, 그리고 여러 부류의 하방한 사람들의 자녀들 사이에서도 연쇄반응이 일어났다. 또한 각지에서 청원조직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전단지를 뿌리고 대자보와 표어를 내붙이고 집단상경하여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거나 청원가두시위를 했는데, 나중에는 임의로 파업해 버리고 단식투쟁까지 했다. 더 심하게는 지도부를 공격하고 간부를 구타했으며 공공기물을 파손하고 상점을 털고 교통시설을 파괴하는 위법행위를 서슴지 않게 되면서 사회의 안정을 심각하게 파괴했다. 하지만 윈난성과 신장 자치구의 아커수 지구를 제외한 대규모 개간 지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고 변경에 있는 내몽골과 [[하이난성]]의 개간 지역, 하향해 있는 청년 수가 가장 많은 헤이룽장 변단에서는 어떠한 소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청의 농장 이탈이 지나치게 과격하고 빠르게 일어나고 있어서, 소요가 일어나지 앟은 곳도 피해를 입었다. 헤이룽장 병단에서는 몇 달 사이에 15만 명의 지청이 도시로 귀향하기 위해 수속을 밟느라 정상적인 생산과 업무 질서가 무너졌다. 건삼강(建三江)농업관리국에 소속되어 있는 농장의 직공 중에서 지청이 8%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중 3/4이 한꺼번에 도시로 귀향해버리자 기관차를 운전할 사람도 없고,장부계산을 할 사람도 없었으며 학생들을 가르칠 사람도 없고 환자를 돌볼 사람도 없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중 가장 심각한 손실을 입은 곳은 운남성의 개간지였다. 1979년 말, 상하이에서 운남성의 각 농장으로 간 4만 7600명 중 3천명만 남았고 사천에서 온 4만 천명 중에는 500명만이 남았다. 등현은 저서 '중국지청몽(中國知靑夢)에서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학교가 휴강하여 교실문은 꽉 닫혀있었고 병원은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중대 어디에서나 사람들이 떠난 빈집들을 볼 수 있었고, 사람들이 떠나간 그 자리에 까마귀와 뱀이 새집삼아 들어와 살고 있었다. 기계경작부대에는 녹슨 기차들만이 가지런히 집안에 엎드려 있었다. 지난날 거친 목소리로 소란스럽게 떠들어 대던 마부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봄갈이를 할 때인데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너른 밭에는 땅을 갈고 파종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수천수만 경(頃)의 칼금자국이 남아 있는 고무나무 숲에는 잡초가 무성했다.어느 농장에는 놀랍게도 수백 명의 늙고 병든 농장의 원 노동자들과 가솔들만이 남아 있었다.한 상급기관의 지도자가 “천하제일단”임을 자부하던 맹납농장을 시찰한 후에 무거워진 마음으로 돌아와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끝내 곁에 있던 직원에게 “우리는 지금까지 뭐하고 있다가 왜 이제서야 겨우 그들을 붙잡아 뒀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인가?”라고 한탄했다. 지청들의 도시 귀환이 농촌에 끼친 직접적인 경제손실은 천만 위안 이상이었다. 그중에서도 윈난성의 농지개간관련 분야의 손해는 1,872만 위안에 달했다. 문제는 농업 노동력의 유실만 일어난 게 아니라 농장을 지탱해주었던 각종 전문기술분야의 인재들과 간부집단을 잃었다는 것이다. 교사, 회계사, 출납, 의사, 약제사, 간호사, 수의사, 농업기술자, 공업기술자, 조종사, 노이구기술공, 전기기술공, 차량기술공, 공구기술공, 고무나무에 칼금을 내는 기술공 등 모든 전문기술자들이 사라졌다. 당국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왕진 부총리는 직접 각지를 돌아다니며 타일렀고 상하이, 운남, 청해 등의 성과 도시의 지도부는 소요현장에 깊숙이 들어가 조사, 처리했다. 요녕성은 성 방송대회를 열어 설득과 교육 작업에 들어갔고 헤이룽 강 성은 긴급통지를 발표하고 주요 책임자들로 팀을 꾸려 농장으로 가서 일처리를 했다. 강소, 안휘, 강서, 호남 등의 성에서는 지청 소요의 징후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적시에 선도해 사태를 매우 빠르게 수습했다. 이렇듯 각지에서는 보편적으로 하향청년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정책을 조정하고 조치들을 개선해나갔다. 현실적인 곤란으로 도시로 귀향해야 하는 지청에 대해서는 주동적으로 해결했고 정책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정책에 따라 농촌에 남아야 하는 지청에 대해서는 사상공작을 열심히 하고 안착조건을 개선하여 그들이 생산과 생활에서 겪고 있는 실질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협조했다.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어 3월 중순이 될 무렵에 '도시로의 귀향 운동'은 완화되기 시작했고 5, 6월엔 대부분의 지역에서 수습되었다. 1980년 여름, 국무원 지청부서는 1년여간 각지에서 중앙의 정책을 관철, 집행하여 지청문제를 종합적으로 계획하고 해결한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도시와 농촌에서 널리 방법을 찾아 350만여 명의 지청이 취업하도록 안배했는데, 특히 1972년 이전에 하향한 백만 명에 가까운 노(老) 지청을 우선 안배했다. 아직 농촌에 있는 200만 명의 지청은 연내에 대부분 안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또한 상산하향범위를 축소하여 이미 노동력이 충분한 농장에 청년들을 내려보내는 걸 자제했다. 국무원 지청부서는 심도 있는 조사연구와 광범위한 의견청취를 기초로 하여 <지금의 지청상산하향공작에 관한 몇 가지 의견>을 내놓았고 중앙서기처에 보고 된 후 토론을 거쳐 원칙적인 동의를 받아냈다.이어서 당 중앙에서 개최한 전국노동취업회의에 상정하여 토론을 거쳐 수정했다. 1980년 9월 6일, 국무원 지청지도소조는 이 문건을 각 성,시,자치구에 발송했다. 문건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앞으로는 도시의 진학을 할 수 없는 고등학교 졸업생들을 안배한다. 이때 각 지역의 구체적인 실정에 맞게 적절한 대책을 세우며 획일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하향시키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는 하향하지 않는다. 전부, 아니면 대부분을 도시에 안배할 수 없는 경우 도시와 농촌 두 지역에서 모두 생산을 증대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안배한다. >둘째, 현지 농촌에서 생산대에 배속된 지청에 대해서는 반드시 “국가가 관심을 갖고 끝까지 책임진다.”는 정신에 입각하여 1,2년 내에 그들의 상황에 따라 완전히 안배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셋째, 교현(郊縣:어떤 도시의 교외에 위치하며, 그 도시의 관할에 속하는 현)에 있는 지청농장 및 지청대에 지청을 안착시켜야 하는 곳에서는 정치동원과 경제적 흡입을 결합한 방법을 실행한다. 지청농장 및 지청대에 들어간 지청의 주거와 양식관계는 도시에서와 변함없고 농장에 남아 취업하는 경우 근로연한을 계산한다. >넷째, 각지의 지청업무기구는 일률적 처리를 강요하지 말고 조정방법(합병 철회 포함)은 상황에 따라 자체 결정한다. 이 문건이 주목을 끈 한 가지는 “능히 하향하지 않아도 되는 곳은 하향하지 않는다.”라고 명확하게 선포한 점이었다. 즉, 더 이상 도시의 지청을 하향에 동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국적인 범위 내에서 상산하향이 곧 종지부를 찍는다는 신호탄이었다. 실제로 1979년에는 전국에서 24만 7천명을 하향시켰고 상하이와 서장성에서는 하향 동원이 없었다. 그리고 1980년 구이저우, 윈난, 티베트, 닝샤, 광둥, 상하이, 장쑤, 저장, 안후이, 산둥 등의 10개 성, 시, 자치구에서는 하향동원의 종결을 선포했으며 기타 19개 성, 시 자치구에서는 15만 5천명만 동원했다. 1981년엔 각지에서 지청을 도시에서 자체적으로 소화할 수 있게 되어서 아직 직업을 구하지 못한 96만명을 안배시키는 일에 초점을 맞췄다. 그후 중국은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에 따라 문호를 개방하고 외국 기업들을 유치하고 경제 개발 계획을 대대적으로 단행했고, 특히 산업구조가 대대적으로 개편되어 기존에 농업 위주였던 산업이 공업, 상업, 서비스업 중심으로 변화했다. 이에 그동안 당국을 골치아프게 했던 도시의 취업난이 완전히 해소되었고 오히려 농촌의 노동력을 도시로 끌어내어 산업 단위에 투입시켜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리하여 상산하향 운동은 존재가치를 상실했고 중국 정부는 1980년 이후 더이상 상산하향 정책을 집행하지 않았다. 다만 하방이 꽤나 오랜기간 동안 진행된 정책이다보니 현대에도 하방이라는 단어는 자주 쓰이는 말이며, [[낙후지역]]으로 이런저런 이유로 보내는것을 관용적으로 하방이라고 한다. 또한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과도한 교육열로 인해 대학 진학률 또한 급속히 올라가서 왠만한 중산층 가정이라면 자녀를 대학으로 보내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대졸자 구직수요가 구인수요를 초과해서 대졸실업문제가 심각해졌다. 또한 후커우 제도로 이동을 어느정도 틀어막아서 한국, 일본, 대만보다는 정도가 덜하지만 농어촌 지역의 고령화 또한 심각한 문제점인데 중앙정부에서 대졸실업난 해소 및 농어촌 발전의 일환으로 대학생이나, 청년실업자, 예비 공산당원들, 은퇴자들에게 농어촌 지역이나 낙후지역으로 취직, 발령보내서 인센티브를 주거나 공산당 가입에 가산점을 주는 등 혜택을 준다. 그러나 이들 낙후지역의 임금수준이 높지 않은데다가, 사회기반시설도 부족하여 젊은층들은 꺼리는 경우가 다수이다. 2020년 코로나 19로 도시지역 실업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별수없으면 농어촌으로 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도시에 눌러앉으면서 사무직에 취직하려는 경우가 다수다. 당장 2022년도에 청년실업률이 20%에 육박한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청년실업문제가 심각하지만 제조업 공단들이 사람이 없다며 볼멘소리가 나오고있으니 미스매칭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